재건부산교회

 

외식과 내면누가복음 11:37-54(신약113page)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수많은 군중들이 둘러싼 가운데서도 바리새인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율법적 규범 속에 철저했지만 그들에게 하나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이신가에 의문이 듭니다.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점심에 초대했습니다. 그런데 정결의식을 중요시 했던 바리새인이 예수님이 씻을 물도 어디에 있는지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초대된 손님이었다면 당연히 씻고 닦을 수건을 준비해서 기다리는 모습도 전혀 없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정결의식을 행하지 않은 것에 대해 이상히 여깁니다.

 

이 모습을 보고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화를 선포하십니다. 너무 과하다 싶을 정도로 그렇게 하십니다. 39절의 말씀을 보시면, “너희 바리새인은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 하도다고 했습니다. 정결의식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외적 표식입니다. 그것은 내면이 정결하다는 것의 외적 신앙의 고백인 것입니다. 그런데 내면이 탐욕과 악독이 가득 차 있다면 아무리 겉을 깨끗이 해 보았자 소용이 없는 일입니다.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이런 모습임을 주님이 책망하는 것입니다.

 

40-41절의 말씀을 보시면, “너희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말씀합니다. 무슨 말일까요? 그 안에 있는 것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구제할 때에 아무런 동기 없이 자기 의를 드러내려고 구제만 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공의와 목숨까지 주는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기독교는 이 두 가지 원리 위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실천하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어렵다고 합니다. 이 사랑과 공의가 공존하는 곳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인 것입니다.

 

42절의 말씀을 보시면, 예수님이 바리새인을 향하여 화를 선포합니다.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말씀합니다. 외적 규범에 철저한데 정말 하나님을 향한 감사에서 우려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조직과 삶을 위한 의무는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없는 십일조는 의미를 상실하는 것입니다.

 

속이 비면 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43절에 보시면, “화 있을 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도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종교적 열심과 지식에 대한 자부심으로 회당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어디에서나 자신이 귀중한 존재라고 인정받고 싶어 했습니다. 종의 마음으로 사랑과 친절함으로 섬기고 희생하는 지도자의 모습이 아닌 것입니다.

 

내면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연합하여 오는 생명력과 성령의 내주 하심으로 성전 됨에서 오는 삼위일체적 인격이 실체하지 않으면 어떤 모습이 됩니까? 44절에 보시면,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바리새인들은 스스로를 거룩하고 정결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실상은 반대였습니다. 이들의 상태는 표시가 나지 않는 평토장한 무덤과 같아서 실제로 풀이 나 있는 평지로 착각하면서 사람들이 지나다녔습니다. 생명의 역동적인 역사를 잃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45절에 보시면 율법교사가 듣고 모욕한다고 항의합니다. 46절에 화 있을 진저 너희 율법 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유대종교가 자신들의 선조들이 죽인 선지자들의 무덤을 치장합니다. 그리고는 자신들도 똑같이 메시야와 사도들을 죽이고 박해하는 것입니다. 오늘 조국 교회도 이런 모습으로 얼룩져 있지 않는지 회개할 때입니다. 더 이상 늦기 전에.

 

 

 

재건부산교회  대한예수교장로회 담임목사 강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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